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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픽션] 포화된 상권의 마지막 한 자리, 3화. 버리는 용기, 조직의 관성을 베다
  • 진익준 작가
  • 등록 2025-11-22 09: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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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운 변화는 '더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익숙함이라는 달콤한 독에 취해 실패를 반복하는 조직의 관성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결단 앞에서만 비로소 멈춥니다.





1. 300억의 무게, 폐기의 고통


결단은 내려졌지만, 실행은 고통이었다.


다음 날 아침, 정우진은 새벽부터 서이수와 함께 주방에 섰다. 서이수가 지목한 18가지 메뉴의 재료들은 냉장고와 창고 한구석을 점령하고 있었다. 계절을 탄다며 억지로 들여놓았던 냉동 해산물, 순이익률이 낮아 손이 가지 않던 특제 양념들, 그리고 언젠가 팔릴 것이라 믿었던 포장 용기까지. 모두 정우진의 ‘혹시나’ 하는 미련과 희망의 조각이었다.


“사장님, 이 양파 춘장 볶음 소스는 한 달간 5개 팔렸고, 원재료비는 90%입니다. 지금 버리지 않으면 10일 후에도 재고로 남습니다.” 서이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갑게 말했다.


정우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거, 본사가 신메뉴라고 야심 차게 밀었던 겁니다. 다른 재료랑 같이 쓰려고 박스로 사놨는데…”


“본사가 팔았습니다. 사장님은 팔지 못했습니다. 본사의 이익이 사장님의 손해로 바뀐 현장입니다.”


결국 정우진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재료들을 하나하나 폐기용 비닐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재료를 버리는 것은 단순히 비용을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2년간 자신의 노력과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인정의 고통이자, 본사의 거짓된 약속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서이수는 말없이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정우진이 스스로 낡은 관성과 결별하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메뉴판을 교체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30가지가 촘촘히 박혀 복잡했던 메뉴판은 순식간에 7가지의 핵심 메뉴만 남긴 단출한 모습이 되었다. 텅 빈 공간은 마치 상처처럼 보였지만, 서이수는 그 텅 빈 공간이야말로 3호점이 ‘선택과 집중’이라는 새로운 경영 철학을 새겨 넣을 ‘여백’이라고 설명했다.



2. 조직의 관성, 출점파의 견제


점심 장사를 막 시작할 무렵, 본사 개발팀 박 팀장이 3호점에 불쑥 들이닥쳤다. 박 팀장은 김 회장(출점파)의 최측근으로, 서이수의 프로젝트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던 인물이었다.


“서 이사님, 이게 뭡니까? 메뉴판이 왜 이 모양이죠? 텅 비어 보이잖아요! 손님들이 뭘 시켜야 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박 팀장은 새로 붙인 깔끔한 메뉴판 앞에서 역정을 냈다.


“박 팀장님, 저희는 ‘많이 보여주기’ 경쟁에서 이미 실패했습니다. 이제는 ‘가장 잘 팔리는 메뉴만 보여주는’ 전략으로 전환 중입니다.” 서이수는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응수했다.


박 팀장은 서이수의 태도에 더욱 불쾌해하며, 트럭에서 꺼내온 듯한 상자 하나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거 받으세요. 김 회장님 특별 지시입니다. ‘봄맞이 한정판 매콤 카레 소스’입니다. 본사 연구팀이 밤새 개발한 겁니다. 마진율이 40%가 넘어요. 이거 몇 개만 더 팔면 3호점 미수금 금방 털어요.”


그것은 전형적인 ‘물류 마진 확대’ 전략이었다. 순이익은 낮으면서 재고만 늘릴 것이 뻔한, 낡은 경영 철학의 산물이었다.


“받지 않겠습니다, 박 팀장님.” 서이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예? 서 이사, 본사 지시예요! 이 소스가 이번 달 본사 실적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박 팀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 팀장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눈빛은 데이터만큼이나 차가웠다.


“박 팀장님. 이 3호점은 이제 본사의 일반적인 경영 프로세스에서 분리되었습니다. 제 100일 미션의 독립적인 실험장입니다. 저는 이 매장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수익이 낮은 메뉴를 폐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재고만 늘릴 신규 필수 품목을 강제하십니까?”


서이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소스 상자를 포장 트럭 쪽으로 밀었다.


“이 소스 상자 하나가 김 회장님의 단기 현금 회수 목표를 달성할지는 몰라도, 정우진 사장님을 파산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데이터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본사의 실패한 경영 철학을 이 실험장에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3호점의 모든 운영 권한은 100일간 저에게 있습니다.


박 팀장은 서이수의 단호함과 논리에 반박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김 회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할 생각에 이를 갈며 황급히 매장을 떠났다.



3. 주방의 리모델링: 운영 피로도를 낮춰라


내부의 적을 잠시 물리친 서이수는 곧바로 3호점 주방의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메뉴를 7가지로 줄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사장님. 메뉴 30가지를 유지할 때는 조리 공간을 나누고, 30가지 재료를 준비하느라 하루 2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이제 재료를 줄이니 동선이 30% 이상 단축됩니다.”


서이수는 주방 동선을 새롭게 짜고, 7가지 메뉴에 최적화된 '주방 운영 시스템(KOS)'을 재설정했다. 튀김, 끓임, 볶음 라인을 단순화하고, 모든 직원이 가장 짧은 동선으로 메뉴를 완성할 수 있도록 조리대 위치까지 조정했다.


정우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3년간 이 주방에서 땀을 흘렸지만, 단 한 번도 이 주방이 '비효율적인 덫'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익숙함이 낳은 운영 피로도가 그를 지배했던 것이다.


“이제 사장님은 재료 준비와 잡다한 메뉴 걱정 대신, 오직 7가지 메뉴의 맛과 품질에만 전념하십시오. 그것이 헬게이트 상권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서이수의 목소리에 담긴 확신이 정우진의 굳게 닫혔던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경영 인사이트]


조직 관성과의 전쟁: 실패하는 기업이나 매장일수록 변화를 두려워하고 '하던 대로'를 고집하는 조직 관성이 강합니다. 특히 수익 모델이 물류 마진에 의존하는 프랜차이즈 본사는 '신규 필수 품목 강제'라는 낡은 유혹을 끊임없이 보냅니다. 리더십은 이 관성에 타협하지 않고, 수익성을 저해하는 모든 비효율(재고, 메뉴, 동선)을 베어내는 '버리는 용기'를 보여야 합니다. 단순화(Simplification)는 복잡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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