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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픽션] 포화된 상권의 마지막 한 자리, 2화. 가장 처참한 성적표, 그리고 번아웃된 점주
  • 진익준 작가
  • 등록 2025-11-19 10: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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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실패는 결국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실패로 귀결됩니다. 화려한 숫자를 쫓던 본사의 탐욕이 빚어낸 그림자 아래, 사장님들은 ‘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미신과 싸우며 홀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1. 헬게이트 상권, 낙성대 3호점


서이수가 탄 택시는 서울 낙성대역 인근, ‘헬게이트 상권’으로 불리는 좁은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이름 그대로 전쟁터였다. 300미터 남짓한 구간에 치킨집 7개, 분식집 5개, 커피 전문점 9개가 바글거렸다. 간판들은 서로 더 밝고 요란하게 빛을 내며 생존을 주장하고 있었고, 배달 오토바이들은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리며 골목을 휘저었다.


이런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유행분식 3호점’은 왠지 모르게 초라했다. 주변의 경쟁사들이 통유리와 화려한 LED 조명으로 무장한 것과 달리, 3호점은 낡은 필름지 때문에 실내가 어두웠고, 간판의 ‘유행분식’이라는 글자는 몇 년 전의 유행에 멈춰 서 있는 듯했다.


서이수는 잠시 차에서 내려 매장을 응시했다. 본사 보고서에는 담을 수 없는, '절망의 습도'가 느껴졌다.

“저기요, 본사에서 또 뭘 가지고 왔어요?”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매장 앞을 서성이는 서이수를 본 유행분식 3호점 점주 정우진이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였으나, 깊게 패인 눈가의 주름과 지친 눈빛은 그가 이미 수년간의 번아웃 상태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작업복에는 음식 얼룩이 묻어 있었고, 그는 본사 사람이 껄끄럽다는 듯 손에 든 물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또 본사에서 매출 올린다고 광고할 물건 들이밀러 왔어요? 아니면, 신메뉴랍시고 또 재고만 늘릴 레시피 던져주고 갈 겁니까?”


정우진의 말투에는 깊은 불신과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본사가 지난 몇 년간 자신의 등을 치며 물류 마진을 챙겨갔던 과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본사 사람들은 그에게 '문제 해결사'가 아니라 '물건을 팔러 오는 영업사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이수는 명함을 건네며 허리를 숙였다. “서이수입니다. 저는 물건을 팔러 온 것이 아닙니다. 김 회장님과 100일간의 계약을 맺고, 이 3호점의 경영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왔습니다.”


“100일? 하하.” 정우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100년이 와도 안 됩니다. 이미 파산한 가게입니다. 본사 덕분에.”



2. 데이터와 현장의 충돌


서이수는 정우진의 적대감을 예상했다. 오히려 당연했다. 본사의 무책임한 출점과 부실한 지원이 빚어낸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였으니까. 서이수는 정우진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매장 안으로 들어가 태블릿을 펼쳤다.


“정우진 사장님. 저는 사장님의 불신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감정이 아닌 숫자와 일합니다. 이 숫자가 곧 사장님의 고통의 실체입니다.”


태블릿에는 3호점의 지난 1년 치 영업 데이터가 깔끔한 그래프로 정리되어 있었다.


“사장님의 현재 일 평균 매출액은 85만원월 순이익은 180만원입니다. 이는 최저임금으로 하루 12시간 일하는 직원 1명의 인건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겁니다.”


서이수는 화면을 전환했다. 화면에는 ‘메뉴별 순이익률’과 ‘재고 폐기율’ 데이터가 나타났다.


“사장님 매장의 현재 주력 메뉴는 30가지입니다. 이 중 순이익률이 5% 미만인 메뉴가 18개입니다. 특히 계절을 타는 사이드 메뉴 7종은 순이익은 거의 없으면서 재고 폐기율이 평균 20%에 달합니다. 사장님은 매일 아침 재료를 주문해서, 팔지 못하고 버리는 폐기 재고에 돈을 바치고 계십니다.”


정우진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가 매일 밤 인건비를 아끼려 혼자 남아 재고를 체크하고 버리던 그 고통스러운 장면들이 숫자로 압축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손님들이 찾으니까… 혹시나 싶어서….” 정우진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이곳은 ‘헬게이트 상권’입니다, 사장님. 손님은 ‘혹시나’ 때문에 사장님의 매장을 찾아주지 않습니다. 이 골목에는 이미 30가지 메뉴를 파는 가게가 50개가 넘습니다. 사장님은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하고, ‘경쟁사의 모든 메뉴를 따라 하는’ 전략으로 운영 피로도만 극대화했습니다.”


서이수는 냉정하게 진단을 내렸다. “사장님은 지난 1년 동안 ‘파는 장사’가 아니라 ‘재고에게 먹이는 장사’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손실은 고스란히 본사가 높은 마진을 붙여 공급한 원자재 대금, 즉 미수금 300억 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3. 폐기 처분, 그리고 5가지 메뉴의 결단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겁니까?” 정우진은 분노를 터뜨렸다. “당신들이 다 망쳐놓고 이제 와서 숫자로 저를 비난하러 온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사장님에게 가장 중요한 결단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서이수는 태블릿을 닫았다.


“오늘부터, 사장님의 주력 메뉴 30가지 중 순이익률 5% 미만인 18가지 메뉴를 당장 폐기하십시오. 남은 것은 핵심 메뉴 5가지와 시즌 메뉴 2가지입니다. 저희의 목표는 메뉴 가짓수가 아닌, 이 7가지 메뉴를 통한 수익의 밀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정우진은 눈을 크게 떴다. “18개를 버린다고요? 손님이 떠나면 어떻게 합니까! 매출이 더 떨어질 텐데요?”


“이미 떨어진 매출입니다, 사장님. 18가지 메뉴를 유지하며 잃는 재고 손실 비용, 인력 운영 피로도, 조리 시간 낭비가 지금 사장님을 파산으로 몰고 있습니다. 100일 안에 3호점을 순이익 1위 매장으로 만들려면, 가장 먼저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서이수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목소리를 낮췄다. 그제야 그녀의 목소리에 따뜻한 설득이 묻어났다.


“저에게는 3호점을 살릴 데이터와 전략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저를 믿고 100일간 본사의 낡은 유행과 결별할 용기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저도 사장님도 실패할 것입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정우진 사장님. 본사의 '출점파' 김 회장이 이 실패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3호점의 운명은 이제 사장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경영 인사이트]


파레토 법칙과 메뉴 리모델링: 과밀화된 외식 시장에서 망하는 매장들의 공통점은 '모든 고객의 요구를 다 들어주려는 비효율성'입니다. 이른바 '80/20 법칙(파레토 법칙)'을 외식업에 적용하면, 수익의 80%는 단 20%의 메뉴에서 나옵니다. 나머지는 재고 부담과 운영 피로도만 가중시킵니다. 따라서 '가장 수익성이 낮은 메뉴를 과감히 폐기'하는 것은 마케팅 비용을 쏟아붓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효과적인 '수익의 밀도'를 높이는 핵심 전략입니다. 생존을 위해선 잘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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