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외식정보=진익준 ]
여기 한 셰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L셰프라 부르죠. 그의 주방은 마치 과학 실험실처럼 정밀하고, 그의 요리는 한 폭의 추상화처럼 아름답습니다. 오늘 저녁, 그는 ‘히말라야 암염 위에서 3주간 숙성한 오리 가슴살과 유기농 펜넬 퓨레’라는 예술 작품을 접시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 요리를 맛볼 이상적인 고객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합니다. 와인의 복합적인 아로마를 정확히 짚어내고, 퓨레의 미세한 질감까지 완벽하게 이해하며, 식사가 끝난 뒤에는 자신의 SNS에 지적인 평론을 남겨줄 그런 고상한 미식가 말입니다.
자, 이제 현실의 카메라로 돌려볼까요? 레스토랑에 젊은 커플이 들어옵니다.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가장 저렴한 파스타와 리소토를 주문합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조용히 식사를 마친 뒤 떠나죠.
질문입니다. L셰프는 방금 누구를 위해 요리한 걸까요?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지불한 저 커플일까요, 아니면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저 고상한 미식가일까요? 저는 L셰프가 평생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이 가상의 손님을 ‘유령 손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수많은 레스토랑이 바로 이 ‘유령 손님’을 위해 요리하다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려 합니다.
지난 칼럼에서 우리는 ‘착한 착각’, 즉 도덕주의적 오류가 어떻게 사장님의 눈을 멀게 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다룰 ‘유령 손님’ 문제는 그 착각의 메뉴 개발 버전입니다. 그 논리 구조는 대략 이렇습니다.
전제: 내 레스토랑은 수준 높은 요리를 선보이는 공간이다.
당위: 따라서 이곳을 찾는 고객은 마땅히 높은 미식 수준을 갖추고 내 요리의 가치를 알아줘야 한다.
결론: 그러므로 내 고객들은 실제로 복잡하고 값비싼 요리를 원할 것이다.
이것은 희망 사항을 사업 계획서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만나고 싶은 이상형의 프로필을 상세히 적어놓고, 오늘 소개팅에 바로 그 사람이 나올 거라고 굳게 믿는 순진함과도 비슷하죠. 하지만 현실의 소개팅이 그렇듯, 현실의 고객은 내 이상과 다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여러분, 메뉴판은 셰프의 예술혼을 담은 선언문이기 이전에, 고객에게 건네는 ‘비즈니스 제안서’입니다. 고객은 주문을 통해 그 제안에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합니다. 메뉴판에 먼지만 쌓여가는 ‘아니오’가 수두룩하다면, 그건 고객의 수준이 낮은 게 아니라 당신의 제안서가 시장의 언어가 아닌 ‘유령의 언어’로 쓰여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메뉴판에도 유령이 살고 있는지 아닌지 진단해 볼까요? 몇 가지 전형적인 증상이 있습니다.
첫째, ‘박물관 전시품’ 메뉴가 존재합니다. 셰프의 자부심이 응축된, 엄청나게 비싸고 복잡한 시그니처 메뉴. 하지만 한 달에 한두 개 팔릴까 말까 하죠. 이런 메뉴는 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메뉴판의 명품관 같은 겁니다. “나는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셰프다”라는 선언이죠. 멋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언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메뉴들이 벌어들인 돈이 줄줄 새고 있다면, 그건 경영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가깝습니다.
둘째, ‘극과 극’의 가격 구성입니다. 아주 비싼 메인 요리 몇 개와, 구색 맞추기용 저렴한 파스타 몇 개. 고객은 양극단의 선택지 앞에서 고민에 빠집니다. ‘내 지갑은 파스타를 원하는데, 내 자존심은 스테이크를 보라고 하네.’ 이런 메뉴판은 고객을 편안하게 하는 대신 시험에 들게 합니다. 결국 고객은 타협안을 찾거나, 아예 다음부터는 오지 않는 선택을 하죠.
셋째, ‘효자 메뉴’에 대한 천대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게를 실질적으로 먹여 살리는 메뉴는 따로 있습니다. 셰프의 눈에는 너무 단순하고 상업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바로 그 메뉴. 하지만 ‘유령 손님’을 좇는 셰프는 이 효자 메뉴를 부끄러워합니다. 레시피를 개선하거나 홍보할 생각은 않고, 언젠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요리’를 알아주기만 바랄 뿐이죠.
이는 마치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가 일자리와 물가인데, 후보자 혼자 연단에 서서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설 자체는 훌륭할지 몰라도, 유권자의 표를 얻지는 못합니다. 메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긋지긋한 유령을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까요? 부적이라도 써 붙여야 할까요? 맞습니다. 우리에겐 아주 강력한 부적이 있습니다. 바로 ‘POS 데이터’입니다.
POS 데이터는 고객이 남기고 간 가장 정직한 발자국입니다. 어떤 메뉴가 어느 시간대에 누구에게 팔렸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사실의 기록이죠. 이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것은 유령이 아니라 실제 고객과 대화를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어떤 메뉴가 우리 가게의 ‘캐시카우(현금 창출원)’이고, 어떤 메뉴가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개(dog)’인지 냉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셰프의 철학을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철학을 고객에게 더 잘 전달할 ‘다리’를 놓아주자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브리지 메뉴(Bridge Menu)’ 전략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의 비싼 시그니처 메뉴가 부담스러운 고객들을 위해, 그 철학의 ‘맛보기 버전’을 제공하는 겁니다. 런치 스페셜, 합리적인 가격의 테이스팅 코스, 혹은 하프 포션이라도 좋습니다. 이는 “내 세계로 들어오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라는 오만한 손짓이 아니라, “제 세계가 궁금하시죠? 일단 여기서부터 한번 시작해 보시겠어요?”라는 친절한 초대장입니다.
고객의 지갑은 가장 정직한 투표용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돈을 써서 당신의 메뉴에 매일 투표하고 있습니다. 그 투표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내 철학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 줄 때, 비로소 메뉴판의 유령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셰프의 철학은 텅 빈 접시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객의 입안에서, 그의 만족스러운 표정 위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습니다. 여러분, 더 이상 머릿속의 ‘유령 손님’을 위해 요리하지 마십시오. 오늘 문을 열고 들어와 당신의 가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실존하는 고객’을 위해 요리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셰프의 철학이 고객의 지갑과 뜨겁게 화해하는 유일한 길이며, 당신의 레스토랑이 예술과 비즈니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