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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한 번으로 정의를 외치는 시대, 우리의 분노는 어디를 향하고 있나?
  • 진익준 논설위원
  • 등록 2025-08-22 17:47:49
  • 수정 2025-08-22 17:5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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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착한 일을 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아: '도덕적 면허'

그 많던 오징어는 어디로 갔을까


얼마 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여수의 한 식당을 향한 비판, 속초 오징어 난전의 가격 논란. 불만 섞인 한 개인의 후기는 순식간에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뒤덮었고, 거대한 분노의 파도가 되어 해당 가게들을 휩쓸었습니다.


우리는 불의를 참지 못했고, 우리의 ‘정의로운’ 댓글과 공유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키보드를 두드리며 느꼈던 그 뜨거운 정의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조금 다른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착한 일을 한 뒤 나쁜 일을 저지르고 싶어지는’ 인간의 기묘한 심리에 대해서 말이죠.




나는 착한 일을 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아: '도덕적 면허'


심리학에는 ‘도덕적 면허(Moral Licensing)’라는 흥미로운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스스로 도덕적이거나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면, 이후에 비도덕적인 행동을 할 때 죄책감을 덜 느끼게 되는 현상입니다. 마치 선행을 통해 ‘면허’라도 발급받은 것처럼 말이죠.


기업이 환경보호 캠페인에 거액을 기부한 뒤, 뒤로는 직원들에게 비윤리적인 대우를 하는 모습. 친환경 제품을 구매했다는 자기만족감에 빠져 다른 곳에서는 충동적인 소비를 하는 우리. 이 모든 것이 도덕적 면허 효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선행을 통해 긍정적인 자아 이미지를 확보하고 나면, 그 균형을 맞추려는 듯 슬그머니 나쁜 행동에 눈을 감게 되는 것입니다.



키보드 위에서 피어나는 정의감: '슬랙티비즘'


이 ‘도덕적 면허’는 디지털 시대를 만나 새로운 형태로 진화합니다. 바로 ‘슬랙티비즘(Slacktivism)’입니다. ‘게으름뱅이(Slacker)’와 ‘행동주의(Activism)’의 합성어로, ‘좋아요’ 누르기, 온라인 청원 서명, 해시태그 공유 등 최소한의 노력으로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참여하며 도덕적 만족감을 얻는 행태를 의미합니다.


클릭 한 번으로 세상을 구하는 캠페인에 동참하고, 공유 버튼으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손쉽게 ‘도덕적 면허’를 발급받습니다. 큰 노력 없이도 ‘나는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은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긍정적 자아상을 얻게 되죠. 하지만 이 만족감은 종종 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참여를 가로막는 함정이 되기도 합니다.



슬랙티비즘의 진화: '온라인 소비자 운동'이라는 이름의 분노


다시 여수와 속초의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특정 가게를 향한 온라인의 폭발적인 비난은 슬랙티비즘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이는 슬랙티비즘이 '소비자 정의'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목표를 만났을 때 나타나는 진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나 인권 문제 같은 거대 담론과 달리, ‘바가지요금’, ‘불친절’과 같은 문제는 훨씬 더 직관적이고 경험적입니다.


우리는 불량한 가게에 대한 비판적인 후기를 남기고 공유하며, 슬랙티비즘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직접적인 효능감을 느낍니다. 나의 행동이 부도덕한 가게를 ‘응징’하고 다른 소비자를 ‘보호’하는, 매우 정의로운 일이라고 믿게 되죠. 우리의 분노는 온라인 공간에서 거대한 여론이 되어, 한 가게의 문을 닫게 할 만큼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클릭 한 번으로 ‘면허’를 따는 수준을 넘어, 직접 ‘심판’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싸우고 있는가


이러한 현상은 이제 음식점을 비롯한 모든 사업자가 피할 수 없는 경영 환경이 되었습니다. 모든 고객이 잠재적인 1인 미디어이며, 온라인 평판이 가게의 존폐를 결정하는 시대입니다. 이제 사장님들은 맛과 서비스는 기본이고, 온라인 소통 능력과 위기관리 능력까지 갖춰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비자이자 이 거대한 여론의 참여자인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분노는 항상 정당한 정의감을 기반으로 하는 걸까요? 아니면 손쉬운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디지털 시대의 소비자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강력한 힘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 힘으로 부당함을 바로잡고 시장을 건강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강력한 칼날을 휘두르기 전에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겨누는 것이 정말 ‘문제’ 그 자체인지, 아니면 그저 손쉬운 분노의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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