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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마시는 세대가 마주한 사회: K-술 문화의 '숙취'는 끝나고 있는가?
  • 진익준
  • 등록 2025-11-25 06: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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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술잔’의 운명, 시대를 거스르는가


우리 사회에서 술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물에 가둔 불(水火)'이면서 동시에 '인간관계의 윤활유'였고, 때로는 '억압적인 사회로부터의 해방구'였습니다. 술 한 잔에 담긴 사회적 의미는 깊고도 무거웠죠.


조선시대 신에게 올리는 제물이었던 술은 구한말 개항기 서양의 위스키와 일본의 맥주(삐루)가 들어오면서 상류층의 향유물이 되었고, 1960~70년대 도시 산업화 시대에는 양곡 관리법에 따른 희석식 소주의 대량 생산 속에 노동과 여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1980년대 경제 호황기에는 폭탄주라는 한국적 발명품과 함께 술자리가 급증했죠. 그때의 술은 성장과 성공의 증표였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고강도 의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익숙했던 풍경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학가의 주점들이 폐업하고, 기업의 '2차, 3차' 문화가 '칼퇴'와 '혼술'로 대체되는 현상을 두고, 혹자는 '코로나 탓'이라고 쉽게 말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촉매제였을 뿐, 한국 사회의 술 문화는 이미 MZ세대라는 거대한 지각변동 앞에서 그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술을 더 이상 '사회생활의 필수 도구'가 아닌, '개인적 건강 투자를 망치는 독'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 MZ세대의 '소버 큐리어스', 새로운 사회 규범



술을 멀리하는 이 현상에는 세계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바로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 맨정신에 호기심을 갖는)' 트렌드입니다. 미국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부터 틱톡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sobercurious 해시태그가 인기를 끌며 확산되었습니다. 영국의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 1월 한 달 금주 캠페인)'는 2013년 4천 명으로 시작했으나, 최근 미국에서만 7천 5백만 명 이상이 참여할 정도로 글로벌한 운동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술을 멀리하는 이유는 우리 기성세대가 술을 마셨던 이유와 정반대에 있습니다.



기성세대 (40대 이상)의 음주 동기MZ세대 (2030)의 비음주 동기
사회적 유대: 조직에 대한 충성, 동료와의 결속개인적 건강: 술은 간과 뇌 건강을 해치는 '투자 방해 요소'
스트레스 해소: 억압적인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 도피정신 건강 관리: 술 마신 다음 날 느끼는 '행오버 불안(Hangover Anxiety)' 회피
가성비: 저렴한 소주로 긴 시간 만남 유지가치 소비: 술은 부동산, 주식 투자를 방해하는 비합리적 지출
아날로그적 관계: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는 '인간미'디지털 안전: 만취 실수로 인한 '디지털 박제' 리스크 회피



특히 '행오버 불안'은 술 문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술은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잊게 할지 모르지만, 다음 날 찾아오는 극심한 우울감과 불안, 무기력은 이들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이죠. 건강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은 술 대신 명상 앱이나 심리 상담소를 찾아갑니다.



3. '제로'의 반란과 중년의 변화: 모두가 건강을 찾는 사회



MZ세대의 이러한 흐름은 산업 생태계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글로벌 주류 판매량이 감소하는 와중에도 무알코올 주류 시장은 매년 9% 이상 고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대체품'이 아니라, '분위기를 즐기되 건강은 챙기는' 새로운 소비 행태를 반영합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러한 흐름을 사업 기회로 포착했습니다. 독일 옥토버페스트에서도 무알코올 맥주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얼그레이 하이볼'과 같은 믹솔로지(Mixology) 트렌드가 확산하며 위스키와 같은 고급 주류를 '쉽고 맛있게' 소비하는 놀이 문화가 정착했습니다. 이제 술은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성세대는 여전히 '만취'를 즐기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통계적으로 40대 이상 중장년층도 90% 이상이 '적당한 음주'를 즐기며, 과음 대신 '1차 내에 음주를 마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이는 건강에 대한 관심 증대와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사회적 변화가 함께 작동한 결과입니다.



4. 숙취 해소 뒤 남겨진 질문: 무엇으로 유대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술 권하는 사회'의 숙취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알코올 관련 사망률이 높았던 암울한 사회적 통계에서 벗어날 희망적인 변화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회학적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합니다.


"술이 사라진 자리, 한국 사회의 유대와 소통은 무엇으로 대체될 것인가?"


과거 술자리는 불평등한 상하관계를 일시적으로 허물고 감정을 교류하며, 정치적 올바름(PC)이라는 잣대 없이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비공식 플랫폼'이었습니다. 술이 사라진 지금, MZ세대는 SNS, 온라인 커뮤니티, 게임, 스포츠 등 새로운 '선택적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조직 내에서 세대 간의 소통 단절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40대가 주재하는 술자리와 20대가 참여하는 온라인 모임 사이에 놓인 간극을 어떻게 메울까요?


미래의 주점과 사회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주점은 더 이상 취하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술 없이도 인간적인 따뜻함과 재미, 그리고 깊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제3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고급 와인바든, 아니면 무알코올 칵테일 전문점이든, 핵심은 '술잔이 아닌 콘텐츠'가 대화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앓았던 '술병(病)'의 숙취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맨정신으로 마주하게 된 새로운 관계의 질서건강한 소통의 방식을 설계해야 할 때입니다. 그 과정은 논리적이면서도 따뜻한 '새로운 유대'를 찾아가는 흥미진진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골목길 컨설턴트

https://blog.naver.com/therefore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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