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외식정보=진익준 작가 ]
[프롤로그]
서른둘, 강민준의 꿈은 재가 되어 흩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의 레스토랑, ‘메사(Mesa)’.
오픈 첫 달, SNS를 뜨겁게 달궜던 바로 그곳.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 메사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져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 매니저! 주문 똑바로 안 넣어?!”
“셰프님! 손님이 짜다고 하시잖아요! 제가 레시피를 바꿨습니까?”
주방과 홀.
요리의 심장과 레스토랑의 얼굴이어야 할 두 공간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휴전선처럼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터의 한가운데, 민준은 텅 빈 포탄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메사의 주방을 지휘하는 권성진 셰프는 불도저 같은 남자였다. 그의 손에서 나오는 요리는 예술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비수였다. 그에게 요리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는 신성한 법칙의 세계였다.
“1분 30초! 정확하게 익혀서 나가! 감으로 하지 마!”
메사의 홀을 책임지는 이수아 매니저는 바람 같은 여자였다. 그녀의 미소 한 번에 까다로운 손님도 단골이 되었다. 그녀에게 서비스는 고객의 모든 변수에 대응해야 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였다.
“셰프님, 3번 테이블 손님이 견과류 알러지가 있으시다고… 소스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권 셰프에게 수아의 요청은 신성한 법칙을 깨는 이단 행위였고, 수아에게 권 셰프의 원칙은 고객을 무시하는 오만함이었다. 스윙도어는 그들의 세계를 가르는 거대한 단절의 벽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었다.
저녁 피크타임, 주문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수아는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의 주문서를 급하게 받아 주방으로 넘겼다.
“셰프님! 7번 테이블, 봉골레 하나 추가요! 맵지 않게!”
권 셰프는 땀으로 젖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문서를 낚아챘다. 알아보기 힘든 글씨. 그는 인상을 쓰며 익숙하게 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했다.
몇 분 후, 홀에서 날카로운 클레임이 터져 나왔다.
“아니, 맵지 않게 해달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매워요? 애가 먹을 건데!”
수아가 굳은 얼굴로 파스타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셰프님, 이거 너무 맵다고 하시는데요.”
권 셰프가 프라이팬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주문서에 그런 말 없었잖아! ‘봉골레 하나’라고만 쓰여있었지!”
“제가 구두로 말씀드렸잖아요! 맵지 않게 해달라고!”
“이 바쁜데 그 소리가 들려? 원칙이 주문서야, 목소리야!”
불꽃이 튀었다. 결국 파스타는 다시 만들어졌고, 손님은 굳은 표정으로 식당을 나섰다. 그날 밤, 민준의 휴대폰에 리뷰 앱 알림이 떴다.
[★☆☆☆☆] 음식 맛은 둘째치고 직원들끼리 싸우는 소리가 다 들리네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다신 안 갑니다.
민준은 마른세수를 했다. 꿈을 담아 오픈한 레스토랑이, 이제는 악몽이 되어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대로는 끝이다.’
민준은 절박했다. 그는 수소문 끝에 ‘죽은 식당도 살려낸다’는 전설적인 컨설턴트, J에게 연락했다. 며칠 후, 평범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메사를 찾아왔다.
J는 요란한 서류가방 대신, 태블릿 하나만 들고 있었다. 그는 음식을 맛보지도, 인테리어를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저 의자에 조용히 앉아, 주방과 홀 사이를 오가는 ‘공기’를 관찰할 뿐이었다.
피크타임이 지나고, J는 민준을 불렀다.
“강 대표님, 이 레스토랑의 가장 큰 문제는 권 셰프도, 이 매니저도 아닙니다.”
민준은 의아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두 사람을 원시 시대 방식으로 싸우게 방치한 ‘시스템’이 문제입니다. 대표님은 지금,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두 부족에게 통역사도 없이 알아서 잘 지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전문용어로 ‘사일로 효과(Silo Effect)’라고 하죠.”
J는 태블릿을 켰다. 화면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거대한 원통형 창고, 사일로의 사진이 있었다.
“각자의 세계에 갇혀, 옆 창고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도 없고 소통할 방법도 없는 상태. 지금 메사가 딱 그 꼴입니다. 이걸 해결하려면 감정에 호소하면 안 됩니다. 먼저, 그들의 ‘언어’부터 통일시켜야 합니다.”
J의 손가락이 다음 화면을 가리켰다. 거기엔 주방 벽에 걸린 모니터 사진이 있었다.
“첫 번째 처방전입니다. KDS, 주방 디스플레이 시스템. 우리는 이 차가운 기계로, 저 뜨거운 전쟁을 멈출 겁니다.”
KDS 설치는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딴 기계 쳐다볼 시간에 팬 한 번 더 돌리는 게 낫습니다! 요리는 감이에요, 감!”
권 셰프는 기계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냈다.
“대표님, 이 비용이면 차라리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 더 쓰는 게…”
수아는 현실적인 비용을 걱정했다.
민준은 J의 말을 믿고 그들을 설득했다. “ 딱 한 달만… 딱 한 달만 이걸로 해봅시다.”
다음 날, 주방 벽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걸렸다. 홀 직원이 태블릿으로 주문을 넣자, ‘띵동’ 소리와 함께 주문 내용이 화면에 명확한 텍스트로 나타났다.
[테이블 5] 까르보나라 (소스 넉넉히) - 19:12:33
[테이블 2] 알리오 올리오 (마늘 많이, 맵지 않게) - 19:13:01
권 셰프는 툴툴거리면서도 모니터를 흘끔거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주문 실수가 ‘0’이 되었다.
고함이 사라졌다.
“저거 아직 멀었어?”라는 질문 대신, 모두가 화면의 시간을 보고 조용히 다음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손님이 “파스타에 베이컨을 빼달라고 했는데 들어있다”고 클레임을 걸었다. 수아가 긴장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주문서에 그런 말 없었잖아!”라며 불호령이 떨어졌을 상황.
하지만 권 셰프는 묵묵히 KDS 화면을 가리켰다. 주문 내역에는 ‘베이컨 제외’ 요청이 누락되어 있었다. 홀 직원의 입력 실수였다.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데이터 앞에서는, 가장 불같은 셰프도, 가장 억울해하던 매니저도 침묵했다.
수아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셰프님. 저희 실수네요. 바로 다시 주문 넣겠습니다.”
권 셰프는 의외의 말을 던졌다. “됐어. 소스 버리기 아까우니 면만 다시 삶으면 돼. 2분이면 나가.”
그 순간, 민준은 보았다. 차가운 데이터가 만들어낸 아주 작은 틈. 그 틈 사이로 ‘이해’라는 따뜻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디지털 평화 조약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J는 아직 부족하다고 했다.
“대표님, 전쟁은 멈췄지만 아직 서로를 ‘외국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서로의 ‘언어’를 배우게 해야 합니다.”
J의 두 번째 처방전은 파격적이었다. ‘역할 바꾸기(Role Swap Day)’.
하루 동안 권 셰프가 홀 매니저의 유니폼을 입고, 수아가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는 것이었다.
“제가요? 저 고리타분한 꼰대 셰프 밑에서요?”
“내가 왜 저 답답한 손님들 비위를 맞춰야 합니까?”
두 사람은 기겁했지만, 민준은 이번에도 밀어붙였다.
그날 메사는 아수라장이었다.
홀에 나선 권 셰프는 밀려드는 손님의 변칙적인 요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와인은 어떤 게 어울리죠?”, “의자가 불편한데 바꿔주세요!”, “아기가 있는데… 이유식 좀 데워주실 수 있나요?” 그의 머릿속은 ‘레시피’처럼 정해진 답이 없는 질문들로 하얘졌다. 그는 처음으로, 수아가 매일같이 얼마나 많은 변수와 싸우고 있는지 깨달았다.
주방에 들어간 수아는 지옥을 맛봤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시간의 압박, 뜨거운 불 앞에서 쏟아지는 땀, 쉴 틈 없이 울리는 주문 알림. 그녀는 그저 레시피대로 파스타 하나를 만드는 것이, 마치 전쟁터에서 폭탄을 해체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처음으로, 권 셰프가 왜 그토록 ‘법칙’과 ‘시간’에 집착했는지 온몸으로 이해했다.
그날 저녁, 녹초가 된 두 사람은 텅 빈 홀에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권 셰프였다.
“…이 매니저, 힘들었겠네. 미안했다.”
수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에요, 셰프님… 제가… 제가 더 죄송했어요.”
그날, 그들은 서로의 신발을 신어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상대방이 얼마나 불편하고 아픈 신발을 신고 있었는지를.
그날 이후, 메사는 완전히 다른 레스토랑이 되었다.
매일 아침, 영업 시작 전 10분. 주방과 홀 스태프가 모두 모여 커피를 마시며 그날의 ‘작전’을 짰다. 권 셰프는 홀의 동선을 고려한 새로운 플레이팅을 제안했고, 수아는 주방이 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주문 노하우를 팀원들에게 교육했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 다른 부족이 아니었다. ‘메사’라는 이름의, 단 하나의 팀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1화에서 최악의 리뷰를 남겼던 그 손님이 다시 메사를 찾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파스타를 주문했다. 잠시 후, 그의 테이블에 완벽한 봉골레가 놓였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홀과 주방 사이를 오가는 직원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진심 어린 미소를.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고 아끼는지, 그 따뜻한 기운이 음식의 맛을 넘어 그의 마음에까지 전해졌다.
그날 밤, 민준의 휴대폰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음식도 최고지만, 분위기가 정말 따뜻하고 행복하네요. 저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입니다. 제 인생 최고의 레스토랑입니다.
민준은 리뷰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꿈은 재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뜨거운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최고의 레스토랑을 만드는 것은 화려한 레시피나 대단한 마케팅이 아니라고.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기꺼이 서로의 신발을 신어보고, 하나의 팀이 되려는 따뜻한 마음이라고. 그 마음이야말로, 어떤 위기도 이겨낼 수 있는 기적의 레시피라는 것을.